둔해진 감수성에 대한 슬픈 위안의 말이다. 늙으면 플라톤도 ‘허수아비’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높은 지혜도 젊음만은 못하다.
‘인생은 사십부터’라는 말은, 인생은 사십까지라는 말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내가 읽은 소설의 주인공들은 93퍼센트가 사십 미만의 인물들이다.
그러니 사십부터는 여생인가 한다.
사십 년이라면 인생은 짧다.
그러나 생각을 다시 하면 그리 짧은 편도 아니다.
‘나비 앞장 세우고 봄이 봄이 와요’하고 부르는 아이들의 나비는, 작년에 왔던 나비는 아니다. 강남 갔던 제비가
다시 돌아온다지만, 그 제비는 몇 봄이나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키이츠가 들은 나이팅게일은 사천 년 전 루스가 이국 강냉이 밭 속에서 눈물 흘리며 듣던 새는 아니다.
그가 젊었기 때문에 불사조(不死鳥)라는 화려한 말을 써본 것이다.
나비나 나이팅게일의 생명보다는 인생은 몇 갑절이 길다.
민들레와 바이올렛이 피고, 진달래 개나리가 피고 복숭아꽃 살구꽃 그리고 라일락 사향장미가 연달아 피는 봄,
이러한 봄을 사십 번이나 누린다는 것은 적은 축복은 아니다.
더구나 봄이 사십이 넘은 사람에게도 온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녹슨 심장도 피가 용솟음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물건을 못 사는 사람에게도 찬란한 쇼윈도는 기쁨을 주나니,
나는 비록 청춘을 잃어버렸다 하여도 비잔틴 왕궁에 유폐(幽閉)되어 있는 금으로 만든 새를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아- 봄이 오고 있다.
순간마다 가까워오는 봄.